천안교회01
복음 안에서의 교제 20
허명도 · 갈2:1-10
제작일 2026.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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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안에서의 교제 (갈 2:1-10) 20260821 허명도 목자 http://tjc.or.kr/
AI 설교 정리
복음 안에서의 교제와 교회 하나됨의 중요성, 진리의 일관성, 성령의 역할, 그리고 은사와 직분의 다양성을 강조한 설교 요약.
본문갈라디아서 2:1-10
- 설교는 복음 안에서의 교제와 교회 하나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성령, 진리, 그리고 교회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며, 개인의 견해가 교회의 공식적 진리와 일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 은사와 직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것이 교회가 복음 전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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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개요
- 예배 준비: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시작하며 찬송가 276장 '하나님의 진리 등대'를 찬양한다.
- 성경 본문: 갈라디아서 2장 1-10절을 읽고, 말씀 설교의 주제는 '복음 안에서의 교제'이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
- 사도 바울이 14년 후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제출하고,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하여 유대인들과의 교제 및 진리 일치를 확인한다.
-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간구하셨으며, 교회 안에서의 하나됨은 성령, 진리, 교회 몸 안에서의 통합이 강조된다.
- 교회는 하나이지만, 다양한 지체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성도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가 된다.
- 교회 분리나 분설은 진리와 하나됨을 해치는 행위이며, 복음은 타협할 수 없다.
진리와 하나됨
- 개인의 견해는 교회의 공식적 진리와 일치해야 하며, 성경은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 성경을 함부로 인용하거나 개시를 받았을 때 교만할 수 있어 검증이 필요하다.
-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개시를 자랑하지 않겠다고 하며, 구원은 믿음과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은사와 직분의 다양성
- 은사와 직분은 다양하며, 모두 성령의 은혜로 주어진다.
- 교회 안에서는 서로 존중하며 하나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와 직분으로 나타나시지만 결국 하나님이시다.
-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것은 교회가 사랑과 실천을 통해 복음 전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다.
교회와 형제자매의 관계
- 교회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서로 존중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 예수님은 가족의 범위를 초월해 모든 형제, 자매를 하나의 대가족으로 삼는 것을 보여주셨다.
- 교회는 이러한 보금자리의 시기제를 통해 기쁨과 감사, 은혜를 나누며 살 것을 권장한다.
전사(자막) 전문▼
예배 들으시기 위해서 준비하시는 마음으로 묵상 기도하시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심으로 전역 감사의 예배 들으시겠습니다. 다같이 찬양 276장 찬양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 길이 빛나니 우리 둘도 등대되어 주의 사랑해 주세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 눈이 헌전해요 살리세 죄의 밤은 깊어가고 성남 물결 설렌다 어디 불빛 없는 마구 찬 눈물이 많구나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 눈이 헌전해요 살리세 너의 궁불 도도라 거친 바다 비춰라 빛을 찾아 헤매 눈이 생명선에 건져다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 눈이 헌전해요 살리세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성령께서 신이 역사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시겠습니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할렐루야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하나님 말씀 전가겠습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 갈라디아서 2장 1절부터 10절까지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절 2절 먼저 같이 읽겠습니다. 2장 1절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뒤돌을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개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야 한 것은 내가 다름질한 것이나 다름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복음 안에서의 교제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과 같이 은하의 시간을 갖도록 하시겠습니다. 먼저 우리 2장 1절을 보게 되면 14년 후에 바나바와 뒤돌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도영진을 보게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한 4번 정도 기록되는데요. 한 번은 회심한 후에 우리 사도행전 9장에 기록이 되어 있고요. 또 한 번은 안디옥교에서 예루살렘의 구제를 위해서 구전금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 가고 바로 또 세 번째는 15장에 바로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는 부분이 있고요. 마지막으로 20장 이후부터 시작되는 우리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잡혀서 많은 고난을 받게 된다는 부분으로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잡혀서 유로마까지 가게 되는 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2장의 14년 후에는 우리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 후에 유대인들이 내려와서 구원 받으려면 할 일을 받고 일법도 지켜야 된다. 이런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게 되고 거기에 우리 사도바울이 바나바와 뒤돌을 데리고 참석을 했다. 이렇게 언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장 2절에 보게 되면 개시를 인해서 올라갔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도바울은 진리를 깨닫게 된 것도 개시를 깨닫게 된 것이고 파송을 받은 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친히 이렇게 나타나서 안디옥교회에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파송해서 보내는 기록이 4등전 13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보금전파할 때도 주의 영이 친히 나타나서 그의 발길을 인도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환상 가운데서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나타나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 그래서 그쪽으로 아시아에서 지역에서 전도하는 것을 막으시고 유럽 쪽으로 건너가게 되는 일이 거기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 공예에 참석하는 부분도 바로 개시를 인해서 거기에 올라갔다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 올라가서 무슨 일을 했냐. 계속해서 보니까요.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보금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의 한 것은 내가 다름질한 것이나 다름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랴하미라. 여기 보니까 전파하는 보금을 저희에게 제출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전두여행을 계속해서 다녔는데 어떠한 내용으로 보금을 전했는지를 그들에게 자세히 제출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진리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을 친히 이렇게 증명하기 위해서 제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기도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에 보게 되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할 수 없어서 이런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저희는 하나가 되기를 위해서 꿈을 구하여야 되는데요.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하나, 그다음에 진리 안에서 하나, 그다음에 교회 곧 몸 안에서 하나. 교회 몸은 바로 우리의 교회 조직, 질서, 권세, 직분 이런 부분들을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부분에서 온전히 하나를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 13절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 13절 몸은 하나인데 몸은 바로 교회를 말하는 거죠.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많은 지체. 몸에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 그러하니라. 그래서 우리 모든 성도가 몸을 이루는 지체인데 이 지체마다 은사가 다 다릅니다. 지체마다 직분이 다 다릅니다. 직분이 또 지체마다 봉사하는 부분이 다 다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러면 한 몸이 되었는가? 13절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은 하나입니다. 그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기 때문에 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다 주안해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또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또한 진리의 성령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진리도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도 하나, 성령도 하나, 그 다음에 몸도 하나. 교회도 하나라는 의미는 뭐냐면요. 이 세상에 구원 받을 수 있는 교회는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또한 전 세계 교회가 다 주안해서 하나라는 거예요. 한 진리 안에서 한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서부터 6절까지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서부터 6절. 성령이 하나 되기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이 하나 되기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 다음에 보니까 몸이 하나, 교회가 하나고 성령이 하나고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그러면서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믿음은 바로 우리가 믿는 진리의 말씀을 말하는 거죠.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세례도 지금 종류가 많죠? 그 다음에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것이 다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것은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 제가 청년 때도 교회 간에 그렇게 갈등도 심하고 다툼도 많고 하면 그냥 편하게 나가서 따로 하나 세우고 기쁜 마음으로, 편한 마음으로 신앙사를 하게 하면 되지 왜 그걸 끝까지 막냐. 그런데 우리 어른들이 끝까지 가서 기원하고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참 힘들게 하신다. 제가 신앙을 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하고 나서 보니까 이미 나간 것 자체로 이것은 인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분리되는 것 자체로. 왜냐하면 이것은 스스로 몸된 교회를 본인이 떠나서 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갔는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없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 많은 교회가 나가서 여기 세웠다가 우리 목자님들 가서 기호하고 그 집은 그냥 거기서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돌아오게 한 것을 기억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화해가 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분위기가 좋아지고 신도가 많아지니까 그때는 또 분설을 허락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분설은 조건 마음을 하는 거지 싸워서 서로 친하지 않으니까 갈등이 있으니까 이거는 분설이 아니라 분리입니다. 그래서 하나임을 이렇게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도바울도 복음을 제출한 이유는 전하는 복음이 다르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진리가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 부분을 위해서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제출을 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사라자들에게 사사로의 한 것은 그때 지명도 있는 사람들에게 사사로의 한 것은 왜냐하면 이것을 갖다가 공론화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굉장히 큰 논쟁이 벌어지겠죠.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위해서 노력했다가 오히려 그것 때문에 큰 다툼과 또 분란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사사를 그들에게 제출하고 얘기를 하는 가운데에서 서로 간의 진리가 하나임을 확인하고 이렇게 진행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름질하는 것이나 다름질하는 것이 헛되지 않게 하람미라. 만약에 그렇게 해서 사도바울도 복음을 전했는데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누구를 더 추종하게 될까요? 사도바울을 더 좋아하겠죠. 우리도 교회도 이렇게 간만에 보게 되면 내가 누구한테 세례받았다. 누구 있을 때 성령 받았다. 우리 성렘들이 이 부분을 굉장히 또 이렇게 남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례를 받지만 누가 죄삼을 해 주십니까? 성령을 받지만 누가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사도바울은 많은 부분에서 세례해 주지 않은 부분을 갖다가 오히려 사도바울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작으로 마지막에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오히려 성도들이 자기를 추종하게 만드는 것은 이것은 이미 위험증조예요. 결과적으로 이건 교만에 빠지게 되고 자랑으로 빠지게 되는 위험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부분을 제출했으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되지 않을 때 결과적으로 사도바울이 얘기하는 것은 내가 전도한 모든 전도사에게 그러면 헛되게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가 되지 않을 때 사도바울이 전도에서 한 사람들을 그들이 인정할까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파송하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자기들 그냥 깨닫고 세례 성령 받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우리 연총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풉니다. 다 같이 한 세례를 받아야 된다. 성령 안에서. 그래서 바로 그 부분을 이렇게 증거를 하는 가운데에서 진정한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지 않게 어떤 경우는 많은 부분에서 보게 되면 우리 개인 견해가 지나치게 강하신 분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는만 알고 남은 모른다. 이런 부분들도 있고요. 또 문제는 뭐냐면 그것이 예전에는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연총 진리연구회나 연총 대표대회에서 이렇게 논의하게 될 때 정식으로 교회에서 인증받은 이런 진리 말씀 외에는 함부로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 견해 올리지 말자. 이렇게 예전에 결정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 견해. 그러면서 남들은 다 모르는데 나만 안다. 이런 뜻의 말씀도 굉장히 위험한 거죠. 이거 정말로 주의를 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리고 또한 공유를 못하고 그냥 그러니까 나만 알고 있는 이런 부분도 역시 위험한 것입니다. 공유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내가 혼자만의 개인 생각이 될 수 있고 이것은 진리에서 조금 이렇게 이탈되더라도 사람들한테 공유를 못하니까 누구한테 지적을 받지 않으니까 이것은 그렇게 굳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가 자연스럽게 변질될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또 하나의 실수가 뭐냐면 내가 필요한 부분만 인용해서 보는 것입니다. 저희가 성경을 보게 되면 이렇게 색깔로 해놓지 않습니까? 그럼 나중에 성경을 보게 되면 색깔 칠한 부분만 보여요. 그래서 최근에 제가 읽을 때는 가급적이면 새로 산 성경책은 그냥 색깔 안 칠하고 먼저 이렇게 봅니다. 나중에 다시 좀 칠하게 하더라도. 그 이유가 우리가 다른 부분도 같이 볼 수 있어야 되는데 내가 필요한 부분만 보여주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런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어떤 특별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고자 할 때 또 그런 구절만 눈에 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예를 하나 적었는데 어떤 사람이 정말로 절망에 빠져서 자살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가운데에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뭘 깨우쳐주나 한 번 보고 최후적으로 결정을 하자. 그래서 성경책을 딱 폈는데 유다가 목매어 죽으니라. 이게 나왔어요. 내가 정말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데 왜 이 성경 후에 나올까? 정말 자살을 해야 되나? 한 번 더 보자. 그러니까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왜 그러지? 해서 마지막 최후적으로 그래도 삼시판이니까 한 번 더 보고 결정을 하자. 딱 폈더니 속히 하라. 그래서 웃기는 얘기지만 성경을 함부로 인용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개시에 자기가 개시를 받아서 이렇게 다른 사도들과 특별히 배운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시 받은 것을 검증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개시를 받으면 첫 번째는 내가 교만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 후사에서 사도 바울은 그 부분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개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내가 자구할까 두려워서 나에게 사단의 가시 이걸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그것 때문에 더욱더 우러러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자기는 그것이 자랑이 되고 교만이 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나중에 믿음에서 떨어질 확률이 굉장히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초기의 일꾼인 장 바나바 이분이 얼마나 많은 사약을 했는지 모릅니다.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교만해졌어요. 결과적으로 그래서 나중에 자기가 황제처럼 멸류관도 만들어 쓰시고 왕의 옷도 그런 도포를 만들어 입고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거다라는 부분을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공유하고 나누고 인증받아야 된다라는 부분을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뭡니까?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교회 제도와 질석 가운데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것을 사도바울이 제출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게시를 통해서 많은 부분을 이미 깨닫고 있어요. 그러면 게시 사도바울이 알고 있는 내용과 우리 사도들이 알고 있는 내용에 비교를 해보게 될 때 사실 누가 더 많이 알고 있을까요? 제가 보니까 이 수많은 서신들을 기록한 것을 보니까 사도바울이 깨달은 정도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럼 잘못하면 그런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마음속에 생기지 않을까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지나치게 염려해서 게시받은 것 자랑하지 않겠다 스스로 그래서 바로 거기서 얘기하려고 하다가 그만둬라. 만약에 사도바울이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가서 보고 들은 것을 다 기록하면 얼마나 많은 분량이 여기서 기록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일부러 그 내용을 우리 사도바울은 기록하지 않았다고 고린도서 12장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서의 자랑은 전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라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1절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까 그래서 우리가 어떤 부분에 대해서 인정받고 칭찬받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간시해 줍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이렇게 마음에 주셨고 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간과 또 힘을 주셨고 재물을 주셨고 그렇기 때문에 또 다하게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이 전부 다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고린도서에서 사도바울을 자랑할 때 항상 얘기하는 부분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 라고 한다는 것은 내 스스로 이런 모든 것을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해서 주신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복음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라는 부분을 우리 사도바울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3절부터 보겠습니다. 여기 보니까 세 번째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할 때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율법과 할 일을 지켜야 되느냐 안 지켜야 되느냐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할 때였습니다. 마지막 결론이 어떻게 났습니까? 우리도 능이 매지 못하던 명봉예를 왜 이방인들에게 두려고 하느냐 그래서 이방인들로서 예수 믿고 돌아온 사람들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고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워 죽음과 음행만 멀리하라고 가르치게 하자. 많은 걸 요구하지 말고 이렇게 해서 결론이 이렇게 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도바울이 한례를 받지 않은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사도바울은 융통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례를 받게 해서 데리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례를 받게 하는 순간에 많은 위험에 노출되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한례를 받게 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사도바울도 한례를 받게 했네. 그럼 사도바울을 공격은 안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빌미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더 한례를 받는 것을 강조할 수가 있겠죠. 그러면 결과적으로 사도바울이 추구하는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한례를 디도는 받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융통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보시겠습니다. 9장 19절. 고린도전서 9장 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로라. 사실은 사도바울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종도되지 않고. 그런데 오히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모든 사람을 그 사람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더 많은 사람을 구원 받게 하는 것이 우리 사도바울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20절.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있는 자가 지른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자기는 이미 율법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냥 율법을 지키는 쪽으로 이렇게 해서 그냥 그렇게 건면하면서 함께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그렇게 인정을 해줬다라는 것입니다. 21절.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미 그들에게 율법이 없는데 굳이 율법을 가르치면서 율법을 지키라고 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고자 함이라. 그래서 우리 사도바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어디 있습니까? 구원받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생활하는 가운데서 구원받게 하고 이방인들은 이방인처럼 생활하는 가운데서 구원받게 하면 된다. 이것이 사도바울입니다. 굉장히 융통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처음에 보게 되면 오히려 디모데를 데리고 갈 때는 할 일을 주면서 데려가게 됩니다. 사도바울 16장 1절부터 3절까지 보시겠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름해 거기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치는 믿는 유대여자여 부치는 헬라인이라. 모치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 디모덴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라. 3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때 그 직영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 일을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치는 헬라인인 줄 다 알밀어라. 왜 이때는 굳이 디모덴에게 할 일을 받게 했을까요? 거기는 모든 유대인들이 디모데를 안다는 것입니다. 누구로요? 그 부치는 헬라인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앞으로 디모데를 훈련시켜서 사육자로 또 동역자로 삼고자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런 부분에 반대를 당할 수 있으니까 굳이 불필요한 갈등을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없애야 되겠다라는 의미로 디모덴에게 할 일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일을 했으니까 사도바울이 동조해줬다. 사도바울도 인정했다. 사도바울도 할 일을 행하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은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제는 구원 받을 때 할래 받고 무할래 받고 할래 받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과 할래는 상관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도바울은 깨달았기 때문에 할래 받으나 안 받으나 의미 없다라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5장 6절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래나 무할래가 효력이 없대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장에는 할래나 무할래가 효력이 없다. 이건 확실하게 사도바울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할래는 이건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뭐가 중요한 겁니까?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 보시겠습니다. 할레나 무할�e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 결과적으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더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할레나 또 무할�e. 할려를 받아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고령전서 7장 18절 19절 보시겠습니다. 할�e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e자가 되지 말며. 무할�e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려를 받지 말라. 그래서 정식으로 사도바울은 할�e 받지 말라. 이렇게 서신을 통해서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사도바울도 할려를 주고 줬었다. 할�e 주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겠죠. 로마서 3장 30절. 할�e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e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의롭다라고 얘기할 분은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데 그분이 할�e와 부할�e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라고 여겨주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e와 상관없이 이제는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 이유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그들이 계속해서 바울사도의 일거수일 조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e 행에 있었다. 이건 할�e 아는다. 그래서 나중에 네 번째 르자를 갔을 때도 이방인을 성전을 들였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잡혀가는 내용이 나중에 20장 이후에, 21장 이후에 이렇게 기록이 된 것을 보게 됩니다 . 6절부터 10절까지 세 가지 부분에서 보금안에서의 교제를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2장 6절 보겠습니다.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주는 것이 없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면 사도바울이 유명한 자들이나 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가진 진리의 말씀과 오늘 내가 전하는 보금은 다 누구로부터 받은 것입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친히 주께로부터.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외적인 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나의 알지 못하고 날 때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하나님께서 궁유려 계시는 가운데서 나를 불러주셨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어떤 외적인 조건을 볼 때 사도바울 자신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사실 구원만 받아도 감지덕지하죠. 그런데 심지어는 사도라는 이런 엄청난 영광의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걸 갖다 받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 세상적인 사회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공격할 것입니다. 저 사람을 우리 공격했던 사람이다. 우리 반대했던 사람이다. 우리 죽였던 사람이다. 어떻게 그 사람을 품고 받아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해방자여, 핍박자였었다, 포행자였었다 이렇게 고백할 때 알지 못하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순이라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죄가 너무나 큰 것을 사도바울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절대로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거나 받아들인 분이 아니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서 5장 16절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여기 보니까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왜 이런 얘기를 쓸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를 거부했었어요.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인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 자칭 하나님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던 사람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중에 본인이 게시를 통해서 또 하늘에서 빛이 내리고 음성이 들리면서 얘기를 하는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셋째 하늘에까지 끌려가지고 말할 수 없는 말을 다 듣고 왔어요. 이제는 부인할 수가 없죠. 그래서 그런 가운데서 보니까 자기가 이전은 너무나 잘못했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전부 다 인간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보고 평가하지 않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 가끔가다 보게 되면 저도 그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옛날 친구들이 우리 교회를 나온다고 할 때 야, 너는 오면 안 돼. 왜 그랬을까요? 얘가 많이 알거든요. 맨날 그 여자나 쫓아다니고 학교 다닐 때 보게 되면 얘가 우리 교회 온다고? 너는 절대 안 돼. 왜 오려고 할까요? 듣지 않으니까 교회는 우리 여학생들이 많다고 하니까 사귀려고 목적을 갖고 오는 거니까 그런데 제가 못 오게 말렸습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라도 오게 할 걸. 그래도 나중에 진리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으면 그것도 좋은 얘기를 할 텐데. 나중에 보니까 자연스럽게 또 그것이 어떤 분들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어떤 선생님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좀 이렇게 데리고 왔는데 아, 목자님 얘는 괜찮은 애예요. 그런데 목자님 얘는 좀 문제아예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얘는 교회생활하기가 참 어려울 거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 미리 평가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왜 그럴까?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때 당시에 예수님은 누구를 주로 찾아다니셨습니까?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다니셨어요. 세리와 죄인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죄인들, 유대인들 자체적으로 율법을 범한 사람들이니까 싫어하죠. 세리가 세금 걷어서 로마에 주는 사람이니까 거의 매국노와 다름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동족들은 어떻게 됐든지 간에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사람들. 어떻게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심지어는 바리샌들과 석유관들을 책망하시는 가운데서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 들어갈 거다. 왜? 그들은 듣고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눈물 흘리고 통곡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였으니까 그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은사와 직분 직무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서 복음 안에서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7절부터 9절까지 보시겠습니다. 도리어 내가 무한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한례자에게 맡음과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한례자의 사도로 삼으시니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은사는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직분은 누가 세우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역사는 누가 해 주시는 겁니까? 이것도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이렇게 보내는 사도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을 서로 간에 깨닫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 보니까요. 또 내게 주인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구보와 개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약수를 하였으니. 이것이 보금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주 안에서, 진리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다. 그러면서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한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 보시겠습니다. 4절부터 보시겠습니다. 4절 건네떼서. 보니까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은사는 여러 가지인데 은사를 주시는 성령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교회 안에 직분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직분을 주시는 주님은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여러 가지나, 수많은 역사가 있죠. 귀신을 쫓는 역사, 병을 고치는 역사, 이적을 행하는 역사, 기사를 행하는 역사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분, 한 주, 한 성령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부분을 통해서 은사는 여러 가지다. 결과적으로 은사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은사 자체를 우리가 다행성을 존중해야 된다는 것 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가 있죠. 또 여러 직분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또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갖다가 서로가 다행성을 존중하는 가운데서 일하는 거다. 우리 천안교에도 지금까지 많은 목자님들이 다녀가셨을 것입니다. 목자님들마다 은사가 다 틀려요. 그래서 천안교에 가장 필요할 때 그 은사 있는 분을 하나님께서 여기 보내셨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시면서 그분 계실 때 필요한 것을 다 받아서 다 쓰고 갈 수 있도록 해주시면 제일 좋겠죠. 마지막 세 번째로 가난한 자를 생각하라. 이 부분을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0절 보겠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우리 사도 바울한테 특별히 아까 얘기한 대로 야구보, 개바, 베드로조, 그 다음에 요한이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회에 가난한 사람들 특별히 생각을 해줘라. 가난한 사람들. 우리 성경에 가난한 사람들은 특별히 하나는 상상 마음에 두고 그들을 염두에 두면서 배려하면서 보살피도록 이렇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도 바울도 본인이 그것을 위해서 힘써 노력을 했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한테 이렇게 그 배려를 해야 될까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므로 수많은 안 믿는 사람들이 그 교회를 칭찬할 것입니다. 정말 저 교회는 사랑 있는 교회,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많은 사람들을 돕는 교회. 이런 부분에 소문이 나면서 더욱더 그 부분이 복음 전파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왜냐하면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니까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면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우려같이 하나가 되게 할 주 없어서 라는 부분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초월할 것은 이제는 혈연, 지연, 학연 이런 모든 것을 다 초월해서 진정 으로 하나가 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든 것을 다 이루셨어요.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최후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셨다.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셨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뭘까요? 마지막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율법의 마지막인, 율법의 그 한 부분인, 마지막이 아니라 한 부분인 내 부모를 공경하라 이 부분을 완수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 밑에 누가 계신지 아시죠? 어머니 마리아가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시만 자기 육신으로 이렇게 자기 배를 통해서 나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래도 어머니라는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극심한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가운데서 어머니 보소서 아들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그래서 그날 이후로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가족의 범위를 초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제는 날마다 그의 마음을 같이 해서 모이를 힘쓰고 자기의 것을 갖다 주고 필요에 따라서 나눠주면서 마찬가지로 큰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런 이유였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가족이 있고 친척이 있는 것은 굉장히 좋은 조건입니다. 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고 더 쉽게 친해질 수 있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범위를 벗어나서 뛰어넘어서 그의 모든 형제, 자매들을 내 어머니로, 내 아버지로, 내 자녀로, 내 손조로 대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가난한 자를 얘기를 하셨는데요. 출애굽기 22장 25절부터 27절 보시겠습니다. 25절 2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여기 보게 되면 가난한 자에게 꼬아줄 때 그냥 꼬아줘라. 그리고 이자 받지 말라.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빌려줄 때 이자를 받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또 빌려갈 때 많은 이자를 주겠다고 하면서 빌려가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이건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기 때문에 뭔가를 저당 잡고 빌려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의 전 재산과 마찬가지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의 가장 큰 재산이 옷인데 옷은 낮에는 뜨거운 것을 가리기 위한 것이지만 밤에는 그것도 또 덮는 이불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불 없이 자야 돼요. 그러니까 해가 지기 전에 돌려보내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 부분은 나중에 가난한 사람의 과정안에서는 쭉 출애굽기 23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신명기까지 그리고 잠원 있는 내용들을 싹 정리를 해서 이렇게 왔으니까 시간 날 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보금안의 시기제인 제일 첫 번째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말라. 두 번째로 은사, 직분, 직무의 다양성을 존중하라. 그리고 세 번째는 가난한 자를 생각하라. 이렇게 얘기하는 가운데서 보금안의 시기제를 기쁘고 감사한 가운데서 은혜를 나누면서 살 것을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천안교회가 정말 이런 교회가 되어서 더욱더 주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이름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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