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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예수교회 True Jesus Church

너는 나를 좇으라 20 김인수

신학생 · 마8:18-22

제작일 2026.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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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좇으라 (마 8:18-22) 20260811 김인수 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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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화면)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장) 너는 나를 쫓으라 마 8:18-22 / 377, 360 (마 8: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 가기를 명하시니라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 너

  • [00:00] (화면)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장)
  • 너는 나를 쫓으라
  • 마 8:18-22 / 377, 360
  • (마 8: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 가기를 명하시니라
  •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
  •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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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_one":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끝까지 따르는 것을 강조하며, 편안함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쫓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summary_three":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끝까지 따르는 것을 강조한다.\n서기관과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하지만, 그들이 끝까지 쫓을 수 있을지 묻는다.\n예수님을 쫓는 삶은 편안함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이다.",

"body_md": "## 예수님의 제자됨\n- 마태복음 8장 18절에서 예수께서 무리에 애워싸여 있음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n- 19절에 서기관이 예수께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라고 고백함.\n-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릿을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너는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시니라.\n- 21절에 제자 중 한 명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요청함.\n-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시니라.\n\n## 제자됨의 의미\n- 제자들이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강조함.\n- 가론 유다는 예수님을 끝까지 쫓지 못해 참 제자가 아니라고 말함.\n- 제자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끝까지 쫓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함.\n-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하는 두 인물(서기관, 제자)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쫓을 수 있을지 묻는다.\n\n## 예수님을 따르는 삶\n- 서기관은 예수님을 쫓고 싶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제자가 되고 싶었다.\n- 예수님은 서기관의 요청에 대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한다.\n- 서기관은 예수님의 대답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이후 본문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n- 제자 중 한 명은 부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신다.\n- 이 제자도 이후 본문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n\n## 제자됨의 본질\n-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며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n- 교회 현실은 성도는 많지만, 제자는 적다.\n- 성도는 부르심을 받은 자이지만, 제자는 예수님을 끝까지 쫓는 자이다.\n- 예수님을 끝까지 쫓을 수 있는 사람은 편안한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n-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편안함을 버리고 불편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n- 서기관은 예수님을 쫓는 것을 명예와 영광을 얻는 것으로 오해했다.\n-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가족의 인연조차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n- 예수님을 쫓는 삶은 가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족을 맡기는 것이다.\n- 예수님을 쫓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n-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n- 예수님을 쫓는 삶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전사(자막) 전문▼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다함께 본문 말씀, 마태복음 8장 18절에서 22절까지 말씀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18절에서 22절입니다.
찾으셨으면 저와 성도님들이 한 구절씩 돌아가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저부터 읽겠습니다.
18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애워싸움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릿을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전학교의 성도님들 평안하십니까?
날씨가 많이 시원해졌습니다.
성도님들도 체감이 되십니까?
우리 삶에 작은 변화가 생겼죠?
이렇게 우리 삶에 작은 변화가 생겼을 때 당연히 날이 더울 때가 있으면 시원해질 때도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우리 삶의 변화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깨닫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너를 나를 쫓으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우리가 소위 신약시대라고 일컫는 시대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공생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열두 명의 제자 이름을 모두 알고 계십니까?
제가 작년에 천안으로 실습을 와서 아동부 친구들에게 숙제를 줬었는데요.
친구들이 아직 열두 제자 이름을 못 외웠더라고요.
숙제를 주고 떠났는데 올 여름에 아이들이 저를 보자마자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다 외웠어요라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아동부도 다 외웠기 때문에 우리 성도님들도 모두 아실 거라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왜 이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시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혹여나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면 당연히 절대로 안 되겠죠.
누군가는 예수님의 이 구원의 복음을, 속죄의 세례를, 약속하신 이 성령을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전파해야 예수님의 희생이 더욱 값진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먼저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신 다음에 그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불러서 그들을 제자로 세우고 또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셔서 자신이 이 땅에 가져온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제자들을 세우고 훈련하는 일은 매우 너무나도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이 열두 명의 제자 모두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갔을까요?
제자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일까요?
제자란 무엇일까요?
제자란 예수님을 쫓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4장 20절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불렀을 때 그들은 곧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이어서 22절에서도 예수님이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도 그들이 가진 것을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세간에 앉아있는 마태를 부르실 때도 마태는 예수님을 쫓기 시작했죠.
이렇든 제자란 예수님을 쫓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왜 가론 유다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아니다, 진정한 제자가 아니다 이렇게 말을 합니까?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끝까지 쫓지 않았기,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참 제자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론 유다처럼 도중에 어느 순간에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을 쫓는 사람을 우리가 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나 자신을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향해서 너무나 자주 제자라고 읽혔죠.
그렇다면 우리들은 정말 제자로서 또 제자처럼 살아가고 있을까요?
제자란 예수님을 끝까지 쫓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예수님을 쫓고 계십니까?
성도님들은 지금도 여전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예수님을 쫓고 계십니까?
오늘의 본문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19절에 보면 한 서기관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21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과연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쫓는 삶을 살아갔을까요?
본문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면서 제자의 의미에 대해서 또 예수님을 쫓는 삶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 마태복음 8장 18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애워싸움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예수님은 현재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본문의 시작은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애워싸움을 보시고 예수님이 무리에 애워싸여 있었다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날 또한 예수님께서는 병든자를 고치시고 또 귀신을 내쫓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지친 예수님은 무리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시고자 할 때 누가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19절을 보겠습니다.
19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선생님이요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이 서기관은 무리 속에 나타나 예수님께 예수님을 쫓고 싶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서기관은 왜 예수님을 쫓기 원했을까요?
이 서기관도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에 대한 소문도 보고 직접 듣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예수님을 쫓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죠.
서기관의 제자로 삼아달라는 요청에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2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20절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들 곳이 없다 하시더라.
서기관은 예수님께 예수님을 쫓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쫓게 해주세요.
이렇게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들 곳이 없다 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얼핏 들으면 생뚱마자 들리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동문서답을 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쫓겠다던 이 서기관의 요청에 그래 나를 쫓아라.
안 된다. 나를 쫓으면 안 된다.
이런 대답이 아니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에 이 서기관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2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21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다음 9절에서 서기관이 어떤 대답을 합니까?
이 서기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대답은 커녕 이 서기관은 아예 더 이상 본문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쫓고 싶다며 예수님이 어디로 가든지 끝까지 쫓겠다던 이 서기관은 더 이상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하운데 21절을 보면 서기관 대신에 또 누가 등장합니까?
21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대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제자 중에 또 하나 서기관과 다른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 사람을 이미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죠.
즉 이 사람은 앞선 서기관과는 달리 예수님을 쫓을 각오가 아주 단단히 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제자들은
제자 중에 또 하나가 예수님을 쫓아나서기에 앞서 예수님께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그 부탁은 어떤 부탁이었습니까?
21절 후반부를 보면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또 다른 제자는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제자의 부친, 이 아버지께서 직전에 돌아가신 것일까요?
왜 이 사람은 예수님께 장례 치를 시간을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21절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지금 현재 당장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태이니 내가 잠시 아버지를 장례하고 돌아와서 당신을 쫓겠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고 또 다른 해석은 아니면 내가 연로한 우리 아버지를 모시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쫓겠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우리가 이해하든 이 제자는 굉장히 효성이 지극한 제자로 보입니다.
부친을 장사할 시간을 달라는 이 제자의 요청에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2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번에도 예수님 아버지를 장사할 시간을 주세요.
이러한 질문에 그래 알겠다.
안 된다.
지금 나를 쫓아야 된다.
이런 대답이 아니라 어떻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도 명확히 이해하기 힘든 이런 어려운 대답을 하십니다.
이번에도 이러한 어려운 대답을 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들은 이 제자를 어떻게 했을까요?
마태복음 8장 23절 배에 오르심에 제자들이 쫓았더니 의아하게도 이 다른 제자 또한 앞서 등장한 서기관처럼 더 이상 본문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다시 등장을 하지 않습니다.
대답은 커녕 23절부터는 아예 다른 주제의 내용이 이야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왜 계속해서 예수님을 쫓겠다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버리는 것일까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우리들도 예수님을 쫓는 삶을 살겠다고 자주 고백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 어떤 이적을 만났을 때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 영은혜가 끝난 후에 예수님을 쫓는 삶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절대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굉장히 자주 고백을 하죠.
하지만 우리들도 어느 순간에는 본문의 이들처럼 사라져 버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란 예수님을 끝까지 쫓는 사람을 제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쫓는다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쫓는다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원문을 보면 이 원어로 쫓는다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따르다, 담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쫓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그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나도 닮은 듯이 살아가는 것을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떠할까요?
우리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은 성도는 많은데 제자는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와 제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장 2절을 보면 이 성도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즉, 여기 있는 모두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죠.
우리들 모두 예수님이 불러주신 성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정말 쫓고 있는지는 또 달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부른받은 성도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쫓는, 예수님의 제자까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런 자의식을 스스로 가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쫓는 예수님의 제자이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쫓을 수 있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예수님을 끝까지 쫓을 수 있는 사람은 편안한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마태복음 8장 19절에서 20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19절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9절 한 서기관이 나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19절에는 서기관이 등장하죠.
이 서기관이라는 직책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해석하는 백성들의 선생님이었습니다.
당시에 이 서기관이라는 위치는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주 부유한 위치에 있는 그러한 부유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은 자신이 이미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으니 이제는 무엇을 얻고 싶었을까요?
그는 이제는 더 나아가서 명성을, 명예를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명성을 더 얻어서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쫓겠다라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서기관의 본심을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당연히 아셨겠죠.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의 이러한 잘못된 동기를 걸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엉뚱해 보이는 대답은 사실은 그의 본심을 직격으로 저격하는 그러한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혹시 교회 안에서 사역이나 봉사를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주 점검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혹시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내가 교회 안에서 어떤 인기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사역이나 봉사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은연 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내가 교회 일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자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쫓겠다던 서기관의 요청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0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의 답변은 어떤 의미일까요?
집이란 어떤 공간입니까?
집은 우리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주는 장소입니다.
우리에게는 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치면 피곤하면 휴식도 취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만약에 집이 없는 사람이 나는 편안한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모순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라는 집이 있고 공중에 새도 둥지라는 거쳐가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 머리 둘 집이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나에게는 편하게 휴식을 취할 공간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집이 없는 예수님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불편한 삶이었겠죠.
예수님은 이것을 서기관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어떤 의미입니까?
즉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이렇게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편한 삶을 쫓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에게 너가 이러한 머리 둘 집도 없는 불편한 길, 풍족하지 못한 길을 나와 함께 갈 수 있 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너가 때론 고통이 따르는 고난이 가득한 나의 길을 나와 함께 끝까지 쫓을 수 있겠냐라고 그의 생각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쫓는 삶을 아주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쫓는 삶이 영광만, 명예만 가득한 삶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서기관은 멋진 말씀을 전파하고 엄청난 이적을 행하시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만 쫓 을 수 있었지 고난을 받으시고 모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이러한 초로한 결국을 맞이하는 불편한 예수님의 모습까지는 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이렇게 때론 불편하고 때론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쫓을 수 있는 사람은 편안한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끝까지 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한 달 동안 다녀왔었는데요.
저번 달에 성도님들께 간증을 했었죠.
그때 두 분의 목자님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두 목자님이 떠올랐습니다.
먼저 만났던 세부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에스겔 목자님은 세부교회 뒤편에 사택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되고 낡고 에어컨조차 없는 그런 사택이었습니다.
에스겔 목자님은 여러 교회를 맡고 계시는데 저희가 목자님과 함께 교울 기도소에 방문했습니다.
이 교회가 정글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님이 오셨을 때 지낼 숙소가 어딘지 궁금했었는데 교회 앞 마당에 나무로 지은 오두막이 있었습니다.
목자님이 볼 기도소에 방문하면 이 오두막 2층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모기가 아주 가득한 곳에서 여기서 잠을 잔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가 마닐라에 갔을 때는 베드로 목자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 목자님은 이 마닐라 교회에 따로 사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지내냐면 교회 1층 구석에 이렇게 구석에 판자를 대고 지붕도 없이 공간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지내셨습니다.
이 두 목자님은 이렇게 머리를 편히 둘 집도 없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분들이 은퇴한 이후에는 이분들이 지낼 어떤 노후도 거쳐도 없겠죠.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분들이 너무 떠올랐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거쳐가 있는데 정말 이 두 분의 목자님들은 머리 둘 곳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편한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분이 정말 열심히 예수님을 쫓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왜 이렇게 불편한 삶을 감내하면서까지도 예수님을 쫓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머리 둘 곳도 없는 이러한 불편한 삶이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쫓는 삶은 편안한 삶은 아닐지언정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에게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에게 머리 둘 거쳐가 없어도 된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예수님을 섬기고 있던 것입니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잘할까요?
바로 외면을 잘합니다.
편안한 삶을 쫓는 사람들이 외면을 잘하는데 예를 들면 교회 바닥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그걸 보게 되겠죠.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볼 때 어떻게 행동하곤 합니까?
교회 바닥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어도 그걸 주우려면 내가 몸을 숙여야 하니 손이 더러워지니 불편해서 그대로 지나갑니다.
신발, 슬리퍼가 정리가 안 되어 있어도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져 있어도 정수기에 갔는데 컵이 없어도 그것을 못 본 척 지나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행동합니까?
내가 불편해지기 때문이죠.
교회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가 보여도 내가 그들을 도우려면 내 마음이 또 불편해지니 어떻게 도와야 할지 생각을 하면 내 머릿속이 또 불편해지니 그들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나에게 어떤 직분을 부탁할 때 어떤 사역을 부탁할 때 우리가 또 어떻게 행동하곤 합니까?
내가 그 사역을 맡으려면 그 직분을 맡으려면 내가 또 불편해지니까 희생을 감내해야 하니까 그들의 요청을, 교회의 요청을 애써 외면하기도 합니다.
교회에는 정말 많은 일꾼이 필요하죠.
우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것을 외면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만은 우리조차 외면하지 않으셨는데 우리는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은 외면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쫓으라고 몇 번이고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셨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자주 들음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불편해진다는 이유로 외면합니다.
바라옵기는 불편함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라옵기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편안함도 포기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끝까지 쫓을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의 인연조차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마태복음 8장 21절과 2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21절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에게 부친의 장사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이 모질게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또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제자를 향한 제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 요구가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에게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라라고 요구하셨는데 또 다른 제자에게는 이번에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나를 쫓으려면 제자가 되려면 가족도 버리는 이러한 아주 매정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런 의미가 아니겠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쫓는 그 삶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을 쫓는 삶이 어떤 상황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잃고 장사를 하고자 하는 그런 슬픈 마음도 그런 효심에 가득한 그런 감정도 자신의 감정보다 예수님을 쫓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어려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기분이 좋고 나쁘고 내 감정과 상관없이 내 감정과 별개로 예수님을 항상 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라는 말씀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모두 버리라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로서의 우선순위 즉 가치관을 올바로 세워야 함을 또 다른 제자에게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치관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에 가치관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특정한 행동양식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가치관대로 행동합니다.
어떤 선택의 순간에, 판단의 순간에 자신이 가진 이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제자란 스승이 살아갔던 그 삶을 자신의 삶에 최우선 가치로 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은 제자라면 이렇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을 지원할 때 저를 가장 망설이게 한 것은 바로 저의 가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 목자님을 통해서 또 교회를 통해서 신학생이 되어서, 목회자가 되어서 나를 쫓으라 이렇게 불러주셨는데 가족들이 걱정되어서 머뭇거렸습니다.
내가 없으면 편찮으신 우리 어머니는 누가 돌보지?
내가 없으면 이 문제투성이에 상처투성이에 우리 가정은 누가 책임지지?
이러한 걱정 때문에 머뭇거렸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는데요.
바로 저에게 저의 가족이 우상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보다도 나의 가정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있었구나.
어쩌면 나의 가족이 나의 우상이 되었을 수도 있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의 가족을, 나의 부모님을, 나의 우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아, 머리 아프다, 헷갈리다.
나에게 왜 이런 상황을 주신 것일까?
예수님을 쫓는 것과 가정을 부양하는 것.
왜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라고 나를 불러주신 것일까?
이러한 질문이 저를 몹시 혼란스럽게 했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서야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이 질문의 해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순종은 예수님을 쫓는 삶을 첫 번째 가치로 두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구나.
이것이 예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진정한 순종의 의미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가족을 버리는 곳이 아닌구나.
저는 예수님을 쫓게 되면 당연히 가족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쫓는다는 것은 가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쫓을 때 예수님께서 낳아주신 것입니다.
남은 내 가족도 돌봐주시겠다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지금 제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떠나자 두 동생이 예전보다 훨씬 어머니를 살뜰하게 살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집안에 잔소리꾼이 없어지니까 분위기가 더욱 좋아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새로운 가족도 주셔서 아주 큰 힘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오히려 저만 예수님을 쫓는 것이 아니라 저의 본 가정도 새로운 가정도 다 함께 예수님을 쫓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너무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도 교회에서 사역할 때, 봉사할 때 어떤 일을 요청받았을 때 가족들로 인해 고민이 될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나는 어린 자녀를 키워야 해서 직분을 맡기에는 너무 바빠.
나는 편찮으신 부모님을 돌보느라 교회에서 사역할 시간이 없어.
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돼.
그래서 예배에 나올 여유가 없어.
이처럼 때론 가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쫓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 우리의 가족을, 나의 가족을 맡기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가족을 돌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예수님을 쫓아야 합니다.
더 이상은 나의 가족이 내가 사역을 거절하는 이유, 내가 직분을 거절하는 이유, 내가 예수님을 쫓을 수 없는 그런 이유가 돼선 안 됩니다.
우리 가족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합니까?
여러분들은 가족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이러한 소중한 가족이라는 존재를 더 이상 핑계거리로, 변명의 거리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된 처사이겠죠 .
바라옵기는 우리가 예수님을 쫓는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가족을 분명 돌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일을 하는, 또 교회에서 맡겨주신 일을 하는, 예수님을 쫓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쫓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 가정도, 우리 가족도 분명 돌봐주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바라옵기는 예수님을 쫓는 삶을 내 삶의 최우선으로 두는, 첫 번째 가치로 두는 저와 성도님이 되기를 예수님 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것으로 말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묵도 하겠습니다.
아멘 다함께 찬송과 360장 함께 찬송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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